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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만큼 소중한 우리 섬 556곳… 얼마나 아십니까"

'한국의 섬' 펴낸 섬 탐험가 이재언씨

....................................................... Eintrag: 22.08.2011
 
조선일보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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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에게는 섬이 세상의 전부였다. 눈 뜨면 만나는 바다는 아름답고 풍요로웠지만, 동시에 사람들의 삶을 가두고 있는 '푸른 담장'이었다. 뱃사람이던 아버지가 들려준 도회지나 먼 일본, 대만의 항구 이야기는 소년의 가슴을 들뜨게 했다. 그러나 아버지 역시 결국 섬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소년은 나이가 들수록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아갔다.

↑ [조선일보]이재언씨가 바닷가에서 멸치를 말리는 횡간도 주민들과 이야기하고 있다. / 여수=허영한 기자 younghan@chosun.com

↑ [조선일보]

↑ [조선일보]한때 뭍을 동경해 떠났던 섬 소년은 중년의 나이에 돌아와 섬 답사 전문가가 되었다. 이재언씨가 등대호를 타고 횡간도에 갔다가 여수 돌산 군내항으로 돌아오는 뱃길. 바다 위로 섬과 육지를 잇는 화태대교의 교각이 올라가고 있다. / 여수=허영한 기자 younghan@chosun.com 15세 되던 1967년, 소년은 섬을 등졌다. 섬의 가난과 배고픔, 밤이면 칠흑같이 내리던 어둠이 싫어 몰래 배를 타고 빠져나왔다. 이후 중국집 배달, 구두닦이, 신문배달 안 해본 것이 없었다. 고등공민학교와 전수학교를 다니고, 결혼하고, 자식 낳고…, '뭍의 삶'을 살았다.

그런 그가 4.7t짜리 동력선 한 척에 몸을 싣고 22년째 전국의 섬을 돌고 있다. 전남 여수에 사는 '섬 탐험가' 이재언씨(59). 우리나라에서 사람이 살고 있는 섬 중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은 없다. 서해의 백령도에서 동해의 독도, 남녘 끝 마라도까지 그는 지난 20여년 간 전국의 유인도와 무인도 556곳을 두 차례 이상 답사했다. 그 결과물로 '한국의 섬' 여수편(2010년)과 완도편(2011년 7월) 두 권이 세상에 나왔다. 큰 섬 작은 섬 어느 하나 빼놓지 않고 '발'(足)로 쓴 책에는 작은 골목길이나 야트막한 방파제 모습에 구전되는 섬 이야기까지 직접 가보지 않고선 알 수 없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곳곳에 섬과 섬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묻어난다.

요즘 그는 세 번째 답사를 진행하고 있다. 한국의 섬을 모두 11권까지 펴내는 것이 목표. 매달 여수 지역의 섬 16곳을 순회하며 복지사업을 벌이는 '여수섬복지네트워크'도 그의 배 '등대호'가 없으면 뜨지 못한다. 그가 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달 초에는 강원도 삼척과 울릉도에서 열린 한국해양학자대회에 초청받아 다녀왔다. 지난 15일 여수 돌산섬 군내항에 정박된 그의 배를 타고 맞은편 횡간도로 들어서자 섬사람들은 이웃 사람처럼 그를 반겼다. 멸치 그물에 걸린 병어를 즉석에서 회 떠 뱃사람들과 점심도 함께했다.

섬을 버린 소년

―어린 시절 어떻게 섬을 떠나게 됐나.

"내 고향 노화도는 요즘 전복 양식으로 유명한 곳이다. 하지만 옛날에는 무척 가난했다. 아침 저녁은 꽁보리밥, 점심은 항상 고구마를 먹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 따라 처음 목포에 나갔다가 엄청난 문화 충격을 받았다. 유달산의 전깃불, 기차, 마차, 건물, 음식, 옷…. 도시는 별천지였다. 그런데도 나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목포의 중학교에 가지 못하고 섬에 머물러야 했다. 결국 집에서 돈 훔쳐 나왔다."

―갈 곳이 있었나.

"먼저 떠난 동네 친구 서넛이 서울 명동에서 구두를 닦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작정 서울로 향했다. 나 역시 중부경찰서 수양다방 앞에서 구두를 닦았다."

―이후의 인생유전이 궁금하다.

"당시 중부경찰서 소년계에서 근무했던 주국진 경사, 이영자 순경 두 분이 나를 예쁘게 봤다. 그분들의 소개로 직업소년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됐다. 나중에는 신문배달을 하며 공부에 더 열중했다. 가끔씩 사주던 자장면 맛을 잊지 못한다. 지금도 나는 외식을 하면 항상 자장면을 먹는다."

―'가출'은 언제까지 이어졌나.

"신문배달하며 고교 과정인 상업전수학교까지 다니다가 군대 갔다. 그때까지 집에는 일절 연락하지 않고 지냈다. 정말로 섬을 버리고 살았던 거다. 결국 그게 내내 마음에 걸렸던 것도 같고…. 제대 후 내가 터를 잡으면서 부모 형제 모두 서울로 올라왔다."

다시 섬으로…

그는 마흔이 다 되어 고향 근처로 돌아왔다. 그사이 신학교를 졸업하고 전도사를 거쳐 목사가 됐다. 그리고 섬 지역의 복지를 돌보고 탐사하는 일을 맡게 된다.

―왜 돌아왔나.

"섬이 싫어 떠났지만, 나는 어쩔 수 없는 섬사람이었다. 군대 시절부터 소위 '섬놈'이라고 놀림받았다. 섬은 아름답고 풍요로운 곳인데 왜 차별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때부터 '돌아가야지…'하는, 귀소본능인지 오기인지 모를 마음이 생겼다. 결국 사람들이 섬을 몰라서 그런 것 아닌가. 어려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바다를 멀리한다. 섬사람들조차 수도 없이 '물가에 가지 마라, 배 타지 마라' 그런 소리를 듣고 자란다. 그래서 다들 뭍으로 나간 것 아닌가. 89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90년 고향으로 돌아왔다."

―섬을 도는 일은 언제부터 시작했나.

"당시 한 선교회에서 배를 마련해줘 섬을 순회하게 됐다. 어릴 때부터 바다를 알고, 섬을 알고, 노 젓고, 돛 달 줄 알았기 때문에 20여년 만에 내려왔어도 바로 시작할 수 있었다."

―섬을 돌아다니는 것은 어떤 일인가.

"우선 자기 배가 있어야 한다. 시간 많이 걸리고 돈도 들고 사진도 찍어야 하고 목숨도 걸어야 한다. GPS가 없던 시절이라 한 번 다 도는데 처음엔 2년 넘게 걸렸다. 섬이라고 다 똑같지 않다. 작은 섬은 잠실야구장만 한 크기에 겨우 한두 가구 사는 섬도 있다. 다녀보니 연구대상이 될만한 것도 많았다. 그런데도 나라에선 섬을 땅덩어리로만 생각한다."

―혼자 배를 몰고 다니며 어떤 생각을 하나. 낭만적일 것도 같다.

"익숙해졌지만, 방심하면 길을 잃는다. 양식장 그물에, 밀물 때 썰물 때… 조심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낭만과는 거리가 멀다. 봄이 가장 무섭다. 항상 안개가 낀다. 길을 잃고 헤매다 해경선에 끌려 항구로 돌아온 것도 5~6번은 족히 된다. 꼬박 이틀 동안 표류한 적도 있다. 지난 5월 신안군 수치도에서 썰물에 물이 빠지면서 정박해 둔 배가 다 넘어갈 뻔했다. 그때 GPS와 니콘 카메라를 잃어버렸다. 가끔씩 밀려드는 밀물을 타고 귀항하며 6~7시간씩 야간항해를 할 때는 내가 즐기는 것 같기도 하다. 누가 물어보면 나는 하늘이 가장 안전하고, 둘째가 바다, 땅이 가장 위험하다고 말한다. 사고 발생률로 보면 그렇다."

버려진 섬에 눈뜨다

―20여년 만에 돌아온 섬의 모습은.

"또 다른 충격을 받았다. 세상이 바뀌었는데도 내가 떠나올 때 모습 그대로 살아가는 곳이 한둘이 아니었다. 왜 섬은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분노가 치밀었다. 그때 전국의 섬을 한번 다 들어가보겠다는 생각을 했다. 91년 무렵이었다."

―실제 전국 섬을 돌아보니 어땠나.

"섬이 얼마나 차단되어 있냐면, 평생 옆 섬을 못 가보고 죽는 사람도 많다. 아직 전기 안 들어오는 섬도 전국적으로 20군데 정도 된다. 꼭 뭍에서 멀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축전지나 태양열 발전기 설치해주면 되는데 인구가 2~3가구밖에 안 되니 외면 받는 것이다. 육지는 복지혜택이 중복된다고 하는데 섬은 차별대우를 받고 있다."

―한 번 순회했으면 됐지, 왜 두 번 돌고 또 세 번째까지 돌고 있나.

"처음 한 번 돌고 나니까 막무가내로 돌지 않고 섬의 생태라든지 역사, 문화, 갯벌 같은 것을 좀 더 알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열정만 갖고 미련스럽게 돌기만 했다. 그래서 10년 만인 2004년 가을부터 이듬해 가을까지 다시 답사했다."

―몇 년씩 간격을 두고 순회하다 보면 많은 변화가 있었겠다.

"섬도 변한다. 새만금으로 사라진 섬, 여천광양만 개발로 사라진 섬이 있고, 유인도에서 무인도로 바뀐 섬도 많았다. 그런 것도 반드시 기록을 남겨야 한다. 지금은 GPS가 없어 잠정 중단됐지만, 밥은 배에서 해먹고 마을회관에서 잠을 자는 강행군이다. 만날 드나들던 배가 아닌 낯선 배를 다들 반갑게 맞아준다."

―여러 가지 일을 겪었을 것 같다.

"두 가구밖에 살지 않는 섬에서 10년간 종살이한 사람을 풀어준 일도 있다. 나이 서른이 넘은 발달장애인이었는데, 겨우겨우 충남 부여의 자기 집 주소와 동네 이름을 댈 정도였다. 집주인 몰래 주소를 받아 적어 놓았다가 부여의 고향집을 찾아가서 가족에게 소식을 전해줬다. 이런 것도 섬이 그만큼 외부와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그 열악한 상황에서 왜 섬에 살까.

"섬은 주민들이 살아감으로써 국토로서 가치가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섬이 훨씬 자원이 많다. 톳, 해삼, 전복, 생선처럼 씨 뿌리지 않고 채취할 수 있는 자원이 있고, 조상들의 무덤이 있고, 그것을 지키며 사는 것이다. 그 사람들 이해를 해줘야 한다.

―유인도가 무인도화되는 곳이 점점 많아진다는데.

"1~2가구 있다가 죽으면 무인도 되는 것이다. 특히 섬은 인구가 적으니까 정치적으로도 대접을 받지 못한다. 작은 섬들은 아직도 70~80년대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일본은 2~3가구 사는 섬이라도 나라에서 관리한다. 일본의 이도(離島)센터처럼 섬을 통합적으로 관리하는 기관이나 단체가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에는 별별 단체 다 있는데 그것만 없다."

―책은 계속 쓸 것인가.

"나는 전문 작가는 아니다. 다만 성실하게 기록하고자 했다. 특히 각 지역 항구별로 섬에 들어가는 노선을 정리한 뒤 이를 동시에 목차로 삼았기 때문에 일목요연하다. 지하철 노선도처럼 처음 섬에 가는 사람들에겐 꽤 유용할 것이다. 지금 3권을 쓰고 있고, 서해안과 동해안의 섬까지 모두 11권을 완간하는 것이 목표다."

―요즘은 섬 복지 활동도 하고 있다.

"분노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나 혼자 조금씩 섬사람들을 돕다가 한계에 봉착했다. 기름값은 비싸고 배는 자꾸 고장나고…. 1년쯤 하다 중단했는데 여수섬복지네트워크에서 연락이 와서 함께하게 됐다. 내 배를 타고 정기적으로 여수 지역 섬을 돌고 있다. 이런 섬 전문 복지기관이 다른 지역으로도 확대됐으면 좋겠다. 통영만 해도 섬이 42개나 된다."

―앞으로 이 일을 계속할 것인가.

"일본의 이도센터 같은 것이 생기는데 일조했으면 좋겠다. 일본은 '섬은 곧 국토'라는 관점이 있는데, 우리는 그런 게 없다. 일본은 독도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무인도를 모두 자기네 섬으로 관리하고 있다. 우리는 독도말고 다른 섬은 관심이 없다. 그러다 보니 섬 관리에 대한 경험이 전혀 쌓여 있지 않다. 섬은 군사적으로 중요하고 경제적으로 수산·관광·생태·에너지자원이 어마어마하다. 일본 이도센터는 정기적으로 개발하고 보호해야 할 섬을 지정하고, 사람들 교육하고 나무도 심는다. 한데 우리나라는 국회에조차 섬 전문가가 없다. 지금 정부는 해양수산부도 없애버리지 않았나. 국회에 해양 전문가가 없으니, 일제시대 법조항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도 많다."전국의 섬을 돌아다니며 섬을 연구하고 저술하고 있는 이재언 목사가 2011년 8월 15일 여수 횡간도를 둘러본 뒤 본인의 선박 등대호를 몰고 돌산도로 돌아오고 있다. /허영한 기자 youngh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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