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려진대로 독도 영유권 분쟁은 1951년 조인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불씨가 됐다. 제주도와 울릉도, 거문도를 한국영토로 인정하면서 독도를 의도적으로 빼 일본은 이를 근거로 영유권 주장을 하게 된 것이다. 대체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시계추를 60년 전으로 되돌려 당시 상황을 추적해 본다.
제2차 세계대전의 두 전범국 독일과 일본은 패망 후 상황이 전혀 다르게 전개됐다. 독일은 전승국인 미국과 영국, 프랑스, 소련 등과 1947년 2월 파리 강화조약을 맺었다. 전쟁이 끝난지 불과 2년만에 평화조약을 체결해 별 잡음이 없었다.
반면 일본과의 강화조약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지 6년만에 이뤄졌다. 강화조약 작업이 시작된 건 1947년. 체결까지 무려 4년이나 끌었던 셈이다.
조약이 이처럼 지체된 원인을 더글러스 맥아더와 해리 트루먼의 관계에서 찾는 역사학자들도 더러 있다. 연합군 최고사령관이자 일본 점령군사령관으로 절대권력을 휘둘렀던 맥아더와 군통수권자인 트루먼 대통령의 불편한 관계가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는 지적이다.
일본을 개혁하고 평화헌법을 만들어주는 등 2년만에 일본의 민주화를 이끌어낸 맥아더는 더 이상 미국이 일본을 통치할 필요성을 못느낀다며 트루먼에 귀국할 뜻을 내비쳤다. 이에 놀란 트루먼은 맥아더를 설득, 계속 도쿄에 눌러앉게 했다. 트루먼은 맥아더를 자신의 재선에 위협적인 인물로 간주해 귀국을 적극 말렸다는 것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두 사람의 관계가 불편하지 않았다면 일본과의 강화조약도 독일과 비슷한 시기에 체결돼 독도 문제가 불거지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연합군최고사령부(SCAP)는 1946년 1월 29일 포고령 677호를 발령한다. 일본의 영토 경계선을 규정한 것으로 여기에서 리앙쿠르(Liancourt, 독도)는 제외됐다. 흔히 '맥아더 라인'으로 불리는 것으로 독도는 한국점령군인 미 24군단(군단장 존 하지 중장) 관할로 명기돼 있다. 사실상 한국영토로 확인한 것이다. 미군은 2차대전때 일본군이 사용한 지도에 독도가 일본 관할 밖에 있어 이를 근거로 '맥아더 라인'을 설정한 것으로 보인다.
그해 6월 발표한 포고령 1033호에도 일본 어선의 독도 12마일 이내 접근을 금지하는 내용이 나온다. 미군은 1947년 4월부터 독도 인근 해상을 전략폭격기 B-29 폭탄투하 훈련장으로 사용했다. 이 바람에 한국 어부 30여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빚어지기도 했다.
강화조약 초안 작업이 시작된 건 1947년 9월이다. 일본 외무성은 '일본 본토에 인접한 부속도서' 리스트를 작성해 SCAP의 외교국에 제출했다. 황당한 것은 일본이 독도 뿐 아니라 울릉도까지 영유권을 주장했다는 사실이다. 이 문서는 워싱턴의 국무부에 그대로 전달됐다.
조약체결 실무를 주도한 것은 국무부의 동북아시아국과 SCAP의 외교국이다. 공교롭게도 두 부서의 책임자가 모두 친일성향의 외교관들이었다. 정작 당사국인 한국은 4년 후에나 이 문서를 접하게 돼 처음부터 불리한 상황이었다.
1949년 11월14일 SCAP의 외교국장인 윌리엄 시볼드(훗날 호주대사로 영전)는 국무부의 2인자인 존 덜레스(훗날 국무장관)에게 극비 서신을 보낸다. 이 편지에서 시볼드는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은 근거가 확실하다"며 "독도는 기상관측 및 레이더 기지로도 적합해 미국의 이익에도 부합한다"고 설득했다.
시볼드는 1905년 러일전쟁 때 일본이 독도를 자국 해군의 전진기지로 삼기 위해 강제로 일본 행정구역으로 편입한 사실을 알고는 미국도 소련과의 대치상황에서 이를 활용하려고 일본 편을 든 것으로 분석된다. 미일 동맹을 근거로 독도를 미군기지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무부 쪽과는 달리 미군은 1951년 여름까지도 독도를 한국의 영토로 간주한 것으로 드러났다. 주한미군부사령관(존 쿨터 중장)은 당시 장면 총리에 보낸 공문에서 독도를 사격장으로 쓰겠으니 허가해 달라고 요청, 한국정부가 이를 재가한 사실이 밝혀졌다.
국무부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덜레스가 양유찬 주미한국대사를 처음 접견한 것은 1951년 7월 9일. 이 자리에서 덜레스는 양 대사에게 강화조약 초안 사본을 건넸다. 초안에는 한국 측 요구사항이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한국정부는 '맥아더 라인' 준수와 함께 전쟁배상금을 요구했었다. 더구나 독도와 함께 파랑도(지금의 이어도)도 빠져있어 충격을 받았다.
파랑도와 관련해서도 해프닝이 빚어졌다. 미국 측이 파랑도의 위치를 묻자 한국은 답변을 못해 결국 가상의 섬으로 결론났다. 후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일본은 해저에 위치한 파랑도에 구조물을 덧씌워 영유권을 주장하려 했으나 태평양 전쟁이 발발해 실패로 돌아갔다. 만약 그때 일본이 계획대로 추진했더라면 파랑도는 지금쯤 일본 소유로 돼 있을지 모른다.
이같은 암울한 상황에서도 한가닥 희망은 있었다. 국무부의 수석 지리학자인 새무얼 복스가 독도를 한국에 편입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국무부는 주한 미국대사관에 독도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해 보고하라는 훈령을 내렸다. 존 무치오 대사는 독도가 '북위 37도15분, 동위 131도53분'에 위치한다는 답신을 보냈다.
그러나 그해 8월 13일 딘 러스크 동북아시아담당 차관보는 독도를 한국 영토에 편입시켜 줄 수 없다고 한국정부에 최종 통고했다. 그의 서한은 일본이 1947년 제출한 '일본의 부속도서' 주장과 거의 일치해 놀라움을 안겨줬다. 러스크(당시 국무부 파견 육군 대령)는 2차대전 끝무렵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한반도에 진입하자 서둘러 38선을 그어 분단의 주역이 된 인물이다.
그렇다고 미국이 일본 편을 들어준 것도 아니다. 독도를 둘러싸고 두 나라가 첨예한 대립을 보이자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 아예 독도를 원문에서 빼버렸다. 이 바람에 독도는 분쟁지역으로 남게 된 것이다.
강화조약은 무려 8번이나 초안이 수정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1차에서 5차까지는 '맥아더 라인'을 주장한 한국의 승리였다. 6~7차에선 일본 땅으로 잠정 결론이 나 그대로 굳혀지는 듯 했지만 미국이 발을 빼 독도는 어느 나라 땅인지 조약에 명시되지 못했다.
결국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1951년 9월 8일 48개국이 서명한 가운데 정식 조인됐다. 태평양 전쟁이 공식적으로 막을 내리고 일본도 미국의 군사통치에서 벗어나 주권을 되찾았다.
미국은 전쟁이 끝난 후 일본을 6년, 한국은 이승만 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2년 동안을 통치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으로 한일 양국간에 긴장국면이 조성되자 미 국무부는 두 나라가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라며 중립적인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그러나 독도 문제 만큼은 미국이 결자해지로 풀어야 할 과제다. 멀리 삼국사기까지 들출 필요도 없고 '맥아더 라인'을 인정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일본도 맥아더가 포고령을 선포할 때 반대를 안했으니 독도를 한국 땅으로 인정한 셈이다.
[유코피아] 박현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