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가장 동쪽 끝에 있는 섬으로, 동경 131도52, 북위 37도14에 위치해 있다. 비교적 큰 두 개의 섬과 작은 바위섬으로 이루어진 화산섬이다. 바다제비, 슴새, 괭이갈매기 등 희귀한 해조류들이 살고 있으며, 천연기념물 제336호로 지정·보호되고 있다. 동해의 맑은 바다와 외로이 떠있는 섬과 해조류들이 어우러져 매우 아름다운 섬이다. 천연기념물 제336호(명칭 - 독도천연보호구역)인 독도는 얼마 전까지 문화재보호법 제33조에 근거하여 일반인의 자유로운 입도를 제한해 왔으나, 2005년 3월 24일 정부방침 이 변경됨에 따라 제한지역(동도,서도) 중 동도에 한해서 일반인의 출입이 가능해졌다. 단, 독도의 자연생태 보호를 위해 1일 입도 가능인원이 1880명으로 제한되어 있다.
동남쪽에 위치한 동도는 높이 98.6m, 둘레 2.8km, 면적 73,297㎡로 유인등대를 비롯한 대부분의 해양수산시설이 설치되어 있으며, 500톤급 선박이 접안할 수 있는 1,945㎡(588평)에 이르는 동도선착장이 마련되어 있어 매일 독도를 찾는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또한 빗물과 담수화 시설을 마련해 하루 1,500ℓ 정도 식수를 생산하고 있어 엄연한 대한민국 국민들의 삶의 터전임을 보여주고 있다. 서북쪽에 위치한 서도는 높이 168.5m, 둘레 2.6km, 면적 88,740㎡로 정상부가 험준한 원추형을 이루고 있다. 현재 어민숙소 1동이 들어서 있어 어민들이 비상시에 대피소로 사용하고 있다. 이외에 부속도서의 면적은 25,517㎡이고, 가재바위, 독립문바위, 촛대바위, 얼굴바위 등 각양각색의 모양을 한 부속도서들이 있다. 이러한 독도의 인근해역은 청정수역으로 한류와 난류가 만나고 있어 연안어장과 대화퇴어장이 형성되어 있어 황금어장을 이루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지질학적, 생태학적, 사회학적인 가치는 물론, 군사전략적 가치에서도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 역 사
독도(獨島)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문헌에 나타난 것은 광무10년(1906년)으로 울릉군수 심흥택(沈興澤)의 보고서 중 병오 음력 3월 5일조에 [본군소속 독도]라 기록되었으며 구한말의 시인이며 우국지사 황현(黃玹)의 "매천야록"에도 광무 10년 병오 4월조(條)에 명칭이 있는 것을 보면 구한말 고종시대부터 이 섬을 독도라 불렀다고 볼 수 있으며, 1882년(고종 19년) 울릉도개척이후 울릉도 주민이 이와 같이 命名한듯 하다. 그런데 광무 9년(1905년) 러일전쟁 때 일본이 이 섬을 강탈한 후 "독도" 라는 우리의 명칭은 없어지고 "다께시마(竹島)"라는 일본명칭과 프랑스이름 "리앙쿠르(Liancourt)", 영국 명칭 "호넷(Hornet)" 으로만 해도(海圖)에 표시되었다. 원래 "다께시마"는 숙종 19년(1693년) 이래 일본인들이 울릉도를 지칭하던 것인데 고종 때 일본인들이 울릉도를 "마쓰시마"(松島)로 개칭하고, "다께시마"의 명칭을 독도에 옮겨 붙인 것이다. "리앙쿠르"는 헌종15년(1849년)에 프랑스의 포경선 리앙쿠르호가 이 섬을 발견하고 배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며, "호넷"은 철종6년 (1855년)에 영국의 함선 호넷호가 이 섬을 발견하고 또한 그 배 이름을 따라 붙인 것이다.
이와 같이 독도 한 섬에 대하여 여러가지 명칭이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초기부터 이 섬을 우산(于山) 또는 삼봉도(三峰島) 등으로 부르고 강원도 울진현(蔚珍縣)에 소속시켰다. 즉 세종실록 권 153지리지(地理誌) 강원도 울진현 조(條)에 울진현의 부속도서를 우산도(于山島)와 무릉도(武陵島-울릉도)로 하였고, 두 섬의 위치와 상호관계를 기록하였다. 즉 "우산, 무릉의 두 섬은 울진현 바로 동쪽바다 가운데 있는데 두 섬의 거리가 멀지 아니하여 일기가 청명하면 서로 바라볼 수 있다.(于山武陵二島 在縣正東海中 二島相 玄不遠 風日淸的 則可望見)" 라고 기록되어 있다. 무릉도는 울릉도의 별칭이다. 울진 동쪽바다 가운데는 울릉도와 독도 이외에 다른 섬이 없고 울릉도와 독도는 일기가 청명할 때 서로 바라볼 수 있어(독도-울릉도 남동쪽 92km) 세종실록지리지의 "우산도", "무릉도"의 기록과 꼭 같으며, 무릉도는 울릉도의 별칭이니 우산도는 독도를 일컬음이 틀림없는 것이다.
그리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도 울진현의 속도(屬島)로 우산도와 울릉도가 기록되어 있다.다만 동국여지승람 주(註)가운데 "일 설에는 우산도와 울릉도가 같은 섬이다 (一說 于山鬱陵本一島)" 라는 귀절이 있고 삼국시대에 울릉도를 우산국이라 한 사실 두 가지를 들어 일본정부 에서는 우산도를 독도라 한 우리의 주장을 반박해 왔다. 그러나 우산도와울릉도를 각각 다른섬으로 구별하여 기록한 동국여지승람의 본문을 버리고 참고로 기록한 주(註)의 일설만을 취하여, 울릉도와 우산도를 같은 섬이라 한 해석은 정당하지 아니하며 삼국시대의 우산국 (于山國)과 세종실록 및 동국여지승람의 우산도는 국(國)과 도(島)의 구별이 있어 그 성질이 전혀 다른 것이므로 일본측의 주장은 우산도를 독도라하는 우리의 주장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나라의 사료(史料)에 독도가 자주 기록되었으나 사람의 발길이 닿기 어려운 섬이었음은 삼봉도(三峰島)기록으로 잘 알 수 있다. 즉 성종실록에 의하면 삼봉도는 동해 가운데 있는 섬으로 처음에는 누구든지 한번도 가보지 못한 수수께끼의 섬이었다. 그런데 강원도 영안도(永安島=咸鏡島)의 유민(流民)이 이 섬에 들어가 산다는 말이 있어 영안도 관찰사는 수차 사람을 보내어 이 섬을 수색토록 하였으나, 한 번도 발견하지 못하고 성종7년(1476년)에 영안도 관찰사 이극균(李克均)이 보낸 영흥인(永興人) 김자주(金自周)등 12명이 삼봉(三峰)을 바라보고 온 일이 있다.
성록실록의 성종 7년 12월 정유(丁酉: 27일) 조(條)에 기록되어 있는 김자주(金自周)의 말에 의하면, 그는 9월 16일에 출발하여 25일에 삼봉도(三峰島)를 바라보니 섬 북쪽에 삼석(三石)이 있고, 다음에 소도(小島)가 있고, 다음에 암석이 서 있고, 다음에 중도(中島)가, 중도 서쪽에 또 소도(小島)가 있는데, 모두 바닷물이 유통(流通)하고 섬 사이에 인형(人形)과 같은 것이 30m쯤 나란히 서 있으므로 겁이 나서 섬에 가지못하고 도형(島形)을 그려 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김자주(金自周) 등은 삼봉도에 상륙하지 못하고 온 것인데 그가 말한 삼봉도의 모형은 지금의 독도와 다름이 없는 것이다. 즉, 섬 북쪽에 삼석(三石)이서 있다함은 서도(西島) 북방에 높이 솟은 3개의 바위섬을 말하는 것이고, 다음의 소도(小島)와 암석(岩石)은 동도(東島)와 서도(西島)사이에 무수히 흩어져 있는 바위들이며, 도(中島)는 서도(西島)를, 중도 서쪽의 소도(小島)는 동도(東島)동남방에 높이 솟은 바위섬을 말한 것으로 대개 지금의 독도와 모양이 같다. 섬 사이에 바닷물이 유통한다는 것은 동도(東島)와 서도(西島)사이를 말한 것으로 짐작되며 인형과 같은 것은 울릉도에서 "가재"라 부르는 "바다사자"를 말한 것으로 보인다. 이상과 같이 우리나라의 여러 사료(史料)에는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의 영토임을 분명히 하고 있고 일본측 사료(史料)인 통항일람(通航一覽)등에도 안용복(安龍輻)의 항의에 의하여 울릉도와 독도를 우리 땅으로 인정하고 독도의 귀속문제를 분명히 하였다.
또한, 1904년(광무8년)에는 일본군함 "쓰시마호"(對馬號)가 독도를 조사하여 그 결과를 발표한 해군성(海軍省) 간행의 조선연안수로지에도 매년 여름 강치(海驪)를 잡기 위하여, 울릉도의 도민(島民)이 수십명씩 와서 섬에 작은 집을 짓고 거주한다고 기록하였고, 1923년 시마네현(鳥根縣) 교육회가 편찬한 "시마네현지"에도 독도의 대하(貸下)를 위하여 나까이(中井養三郞)가 1903년 농상성(農商省)에 교섭하였다고 기록하였는데 이때 일본정부는 독도를 한국영토로 인정했기 때문에 허가원을 처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은 1905년(광무9년) "시마네현" 고시 40호로 독도를 "다께시마"로 개칭하고 시마네현에 편입시킨 다음,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에 의하여 한국에 대한 세력을 얻은 후, 1906년(광무10년) 4월 8일 이 사실을 울릉군수 심흥택(沈興澤)에 통고하였다.
그러나 이 때의 한국정부는 이미 실질적인 주권을 잃은 때였으므로 아무 항의도 제기하지 못하였다. 일본이 과연 독도가 일본 고유의 영토라고 한다면, 1903년 "나까이"가 독도를 일본에 편입시켜 자기에게 대하(貸下)해 주도록 신청할 필요도 없거니와 일본이 1905년 일개 현(縣)의 고시로 독도를 일방적으로 시마네현에 편입시킨 후 울릉군수를 찾아와 독도가 일본에 편입되었다는 사실을 통고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같이 일본은 독도를 점유하려 하였으나 지리상 일본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우리나라와 가까와 그 후에도 일본인은 독도를 우리나라 영토로 인식하였다. 즉, 다부찌(田淵友彦)의 한국지리지<제국백과저서 134편> 1908년(융희2년)에 간행된 한국수산지(水産誌) 등에도 독도를 울릉도와 같이 한국영토로 표시하였다. 그러나 1952년 1월 18일 한국정부가 "인접해양의 주권에 관한 대통령선언을 선포하자 (이승만라인) 1월 24일 일본은 외무성 각서로 이를 항의하고 독도의 일본소속을 주장함으로써 영속권(領屬權)문제가 발생하였다. 일본은 선점권(先占權)을 내세우나 국제법상 선점권의 효과가 발생하려면 그 지역이 무주물(無主物)이어야 하며, 영토취득의 국정의사(國定意思)와 대외공포가 있어야 하고, 그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 점유하고 있어야 한다.
독도가 무주(無主)의 지역이 아님은 이미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독도는 서기 512년 이래 한번도 한국 영토에서 분리되거나 타국의 지배를 받은 바도 없었고, 사람이 상주하고 있지 않았다 해서 주인없는 지역으로 삼을 수 있는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또한 일본은 영토 취득의 국정의사를 표명하였다 하나, 1905년 남의 영토를 상대국으로 가장 가까운 한국 정부와 상의도 없이 1개 지방 관청의 고시로 처리함은 상식 밖의 일로서 그 고시는 국가를 상대로 한 대외적 의사표시로서는 효과가 없는 것이다. 일본의 일부 극단주의자들이 독도의 무력 탈취를 꾀한 때도 있었으나, 이제는 우리의 경찰이 1956년 독도 의용수비대(대장 홍순칠)로부터 인수하여 조상이 물려 준 국토의 마지막 한치를 지켜가고 있으며 외로운 섬을 찾아드는 희귀 해조류(海鳥類)를 보호하기 위하여 독도 일원의 섬 178,781㎡를 1982년 11월 16일 천연기념물 제 336호 "독도 해조류(바다제비, 슴새, 괭이갈매기) 번식지"로 지정하였다.
정보제공자
* 울릉군 문화관광과 관광진흥계 |
* 독도관리사무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