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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포클랜드한테 한수 배우기

....................................................... Eintrag: 31.08.2012
 
독도, 포클랜드한테 한수 배우기
 
세상의 모든 나라 역사-포클랜드
 
이승호 객원기자 | letitbi@hanmail.net
 

한일 양국간 독도 논쟁이 뜨겁다. 양국간 감정의 골도 날이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우리는 감정적으로 “독도는 우리땅”이란 구호만 외치는 감이 있다. 좀더 냉정하게 사태를 주시하며 국제사회에 어필할 수 있는 논리를 개발-정리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남미 대륙 남단 남대서양의 포클랜드(아르헨티나명 말비나스)를 둘러싼 분쟁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오늘날 의 한일간 독도분쟁보다 백 배 더 복잡하고 골치아픈 분쟁이다. 포클랜드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타산지석의 교훈이 엿보일 수도 있겠다.

우선 어떤 곳인지 알아보자. 포클랜드 제도는 200여 개의 자잘한 섬들로 구성된다. 이 가운데 동 포클랜드와 서 포클랜드 두 섬이 가장 크다. 포클랜드 정부는 영국 부속령인 사우스조지아, 사우스샌드위치 제도, 섀그클러크 암초 등을 관리한다. 면적은 2,000km2다.

포클랜드는 영국과 아르헨티나가 오랜 세월 영토분쟁을 벌여온 곳

포클랜드는 영국과 아르헨티나가 오랜 세월 영토분쟁을 벌여온 곳이다. 여전히 현재진행증이다. 서로 내 땅이라고 내세우는 논리가 제각각이다. 우선 ‘누가, 어떤 나라가 먼저 발견하고 먼저 찜을 했으냐’부터 두 나라의 주장이 엇갈린다.

아르헨티나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인으로 조합된 마젤란 탐험대가 16세기 초 포클랜드를 발견했다고 주장한다. 영국은 1592년 영국인 존 데이비스가 ‘욕망’이라는 이름의 배’(Desire)를 타고 찾아왔다고 주장한다. 1690년에도 영국인 존 스트롱 선장이 찾아왔다고 주장한다.

두 나라는 이렇게 오래 전부터 포클랜드를 16세기 초 스페인인이 먼저 발견했느냐, 16세기 말 영국인이 먼저 발견했느냐는 문제를 두고 논쟁을 벌이고 있다. 이것은 한낱 명예의 문제가 아니다.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아르헨티나는 ‘우리는 스페인의 계승자이므로 포클랜드도 상속받아야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영국은 ‘최초 발견자는 존 데이비스 혹은 존 스트롱’이라고 맞받아친다. 실제 포클랜드 국가 홈페이지(http://www.falklands.gov.fk)의 역사 코너에 마젤란 함대니 스페인이니 하는 얘기는 그림자도 찾을 수 없다. ‘최초 발견자가 누구냐’는 논쟁은 이렇게 무승부로 끝난다.

최초 상륙자는 17세기 말의 영국 탐험대다. 포클랜드(Falkland)는 당시 탐험대의 영국 해군장교 이름이다. 이 사실을 들어 영국은 줄기차게 포클랜드가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고 있다.

프랑스도 포클랜드에 대해 걸떡거렸다

그즈음 수년간 프랑스 배가 들락거렸다. 그러다가 1764년 프랑스인 루이 앙투안 드 부갱빌이 이스트 포클랜드에 정착, 최초의 주거지를 건설했다. 프랑스도 이렇게 ‘최초’를 하나 갖게 됐다. 프랑스도 한동안 포클랜드에 대해 걸떡거렸는데 이런 역사적 사실 때문이다.

이후 포클랜드에는 프랑스의 어부들이 이주해왔다. 프랑스 어부들은 이곳 이름을 고향의 지명에서 따온 말루앵(Les Iles Malouines)이라 붙였다. 말비나스(las Islas Malvinas)라는 이름은 말루앵의 스페인식 표기다.

1765년 영국의 존 바이런 제독이 웨스트 포클랜드에 정착했다. 그는 부갱빌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영국 측 주장) 그는 ‘서 포클랜드는 영국 땅’이라고 중얼거렸다. 이듬해 영국은 정착지(Port Egmont)를 건설했다.

당시 잘나가던 스페인은 프랑스인과 영국인들을 섬에서 몰아내기로 결정했다. 프랑스 거주시설은 돈 주고 사버렸다. 영국인들은 힘으로 추방해버렸다. 1774년 영국은 눈물을 삼키며 섬에서 철수했다.

그때 영국은 식민지 미국이 독립전쟁을 벌이자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떠나면서도 영토권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 표시로 무슨 판떼기같은 걸 섬에 박아놓고 떠났다. 당시의 역사를 영국은 ‘스페인의 포클랜드 침략’으로 기록한다.

스페인도 걸떡거렸다

한편 스페인은 아르헨티나의 수도인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프클랜드를 관리할 관리를 보내 반세기간 섬을 식민 지배했다. 최초의 식민지배였다. 그러나 1811년 스페인군은 동 포클랜드에서 철수했다. 당시 스페인은 남 아메리카에서 폭발하고 있던 식민지들의 독립운동으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영국은 고소해 했다.

1816년 아르헨티나가의 부에노스 아이레스 정부가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정부는 스페인의 계승자임을 주장하며 1820년 포클랜드 제도에 대한 주권을 주장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정부의 명분은 이랬다.

“스페인은 1494년 포르투갈과 신대륙을 분할하는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맺었다. 그 조약은 1493년의 교황칙서에 근거한 것이다. 또한 포클랜드는 또 영국보다는 아르헨티나에 가깝지 않은가. 게다가 영국의 식민지 상황을 종식시켜야 한다. 그러니 포클랜드는 당연히 우리 것이다.” (지도를 보면 포클랜드~아르헨티나 간 거리는 약 480Km다. 포클랜드~영국 간 거리는 13,000 Km가 넘는다.)

간단히 말해 아르헨티나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면서 포클랜드의 영유권도 넘겨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영국은 ‘아르헨티나가 포클랜드를 가지면 그건 식민지 아니냐’고 빈정거린다.
▲ 루이 베르네

1820년 화가 난 아르헨티나는 포클랜드를 되찾기 위한 무력행동에 돌입했다. 당시의 역사에 대해 영국은 ‘1820년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사나포선(privateer)이 포클랜드 제도를 먹겠다고 덤벼 들었다’ 식으로 기술하고 있다. (사나포선이란 해적선과 비슷한 것이다. 영국은 부에노스 아이레스 정부도 모르는 상태에서 사나포선이 깡패짓을 했다는 식으로 역사를 쓰고 있다. 영국 측은 ‘1823년 사나포선은 정착지 건설을 시도했다. 그러나 몇 개월 만에 실패했다.’고 기술한다.) 싸우다 지친 영국과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1825년 우호통상 조약을 맺는다.

다시 영국 측이 쓴 역사를 보자. ‘1826년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루이 베르네(Louis Vernet / 프랑스계)라는 자가 사나포선을 동원, 새로운 정착지를 건설했다. 1829년 부에노스 아이레스 정부는 그에게 포클랜드의 ‘무임금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영국은 이에 ’공식적으로‘ 신경질을 부렸다. 베르네는 영국을 무시했다. 1828년 아르헨티나는 이주민을 프클랜드로 보냈다. 그들은 아르헨티나 최초의 정착민으로 기록된다. 군대도 주둔시켰다. 포클랜드를 통치할 지사도 파견했다.

미국도 걸떡거렸다

1831년 베르네는 바다에서 어로사업을 하던 미국 배 3척을 나포했다. 운 없게도 잠자는 사자를 건드린 격이었다. 미국은 군함을 동원, 이스트 포클랜드 섬의 아르헨티나인 정착지를 부숴버렸다. 아르헨티나인들은 미국 군함에 실려 추방됐다.

영국은 고소해했지만 그럴 일도 아니었다. 미국은 ‘포클랜드는 그 어떤 정부의 소유도 아니다’라고 선언했던 것이다. 미국은 얼마 뒤 ‘향후 50년간 미국은 포클랜드에서 물고기 등 각종 해물을 건져 올릴 수 있다’고 자기 잇속을 차렸다.

전반적 상황은 영국에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1833년 영국은 군대를 동원, 섬에 남아 있던 아르헨티나 군인과 이주민들을 쫓아냈다. 영국은 ‘섬은 우리 것이야’라고 다시 소리쳤다.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두고 보자’며 일단 후퇴했다.

영국은 그 소리를 못들은 척하고 섬을 갖고 놀기 시작했다. 1천 명 이상의 영국인들을 프클랜드로 이주시켰다. 1841년 관리인을 파견했다. 1845년에는 스탠리(Stanley)를 수도로 정했다. 1885년 1,800명 규모의 영국인 커뮤니티가 형성됐다. 1892년 포클랜드는 영국 식민지가 되었다. 아르헨티나는 화가 났다. 영국의 섬 점령에 항의했다. 영국이 더 셌다. 뾰족한 수가 없었다.

2차대전 후에도 포클랜드 영토 귀속 문제는 계속됐다. 1964년 국제연합 식민지 해방위원회가 개입했다. 대화로 풀어보자고 했지만 잘될리 없었다. 아르헨티나는 열심히 로비를 했고, 유엔의 시도는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한편 1966년 포클랜드의 인구는 2,564명이었다.)

두 나라는 계속 티격태격했다. 1982년 4월2일 아르헨티나의 군사정부는 영토회복 운동을 선언했다. ‘포클랜드 전쟁’이 터졌다. 아르헨티나가 포클랜드를 침공하면서 전쟁이 시작됐다. (영국은 ‘아르헨티나의 군사정권이 전쟁을 일으킨 실제 이유는 국내에서의 군사독재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라고 역사를 정리한다. 이 말은 사실이지만 아르헨티나의 영토회복 전쟁이 정당성을 부인할 수는 없는 것이다.)

칠레도 걸떡거렸다

칠레를 뺀 라틴 아메리카 제국은 아르헨티나 편을 들고 나섰다. 칠레가 빠진 이유는 자기도 포클랜드를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은 칠레한데 ‘가만 있을 거냐?’고 물어봤다. 이 말에 칠레는 자기 나라 하늘을 영국 전투기가 날아다녀도 좋다고 허용했다. 칠레의 영공 허용은 영국이 전쟁에서 이기는 결정적 기회를 제공한다.

프랑스와 스페인을 뺀 유럽제국과 미국은 영국 편을 들고 나섰다. 미국 대통령 레이건은 아르헨티나를 테러 집단이라고 비난했다. 영국의 ‘철의 여인’ 대처는 레이건이 사랑스러웠다. (이때 레이건과 대처는 부부간이라는 블랙유머가 퍼졌다.) 아르헨티나군 655명, 영국군 236명이 전사하고, 6월 14일 아르헨티나는 영국에 항복한다. 영국은 이 날을 ‘포클랜드 해방일’로 기념하기로 했다.

‘철의 여인’은 정치적으로 급부상했다. 다음 해 선거에서 대승했다. ‘철의 여인’은 대처리즘을 부르짖으며 영국의 위상과 영국인의 자존심을 업그레이드 시켰다. 반면 아르헨티나는 6월 14일을 국치일로 기억하게 됐다. 아르헨티나 칼티에리 대통령은 항복선언 얼마 뒤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영국은 2007년 포클랜드는 전쟁 25주년을 맞아 성대한 기념행사를 열었다. 그 꼴을 지켜보는 아르헨티나는 씁쓸하기만 했다.

두 나라의 분쟁은 여전히 내연하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남미의 친구들을 포섭하려 한다. 브라질ㆍ아르헨티나ㆍ파라과이ㆍ우루과이 등은 친 아르헨티나 성향이다. 남미국가연합과 라틴아메리카-카리브국가공동체(CELAC) 등도 아르헨티나 편이다. 이에 영국은 국가안보회의를 개최하는가 하면 외교전을 펼친다. 총성없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정작 포클랜드 주민의 의견은 어떨까. 그들 다수는 영국령 존속을 지지한다. 가난한 나라에 속하기 보다는 부자 나라에 속해 사는 게 이익이라는 계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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