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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도 소개
 
 
 

동방의 시작 한반도 땅 독도!

정음문화연구원장: 최은경

....................................................... Eintrag: 18.11.2009
 
한반도 고유 영토이며 동방의 시작을 알리는 섬 독도!
일본 식민지의 속박으로부터 벗어 난지 60년이 지났건만 독도는 여전히 일제의 잔재로 남아 한.일 양국 간 분쟁의 표상으로 깊은 신음과 함께 아침을 열고 있다.
한반도 전쟁 또한 휴전 상태를 안은 체 이념의 대립으로 긴장 속에 있으며 국내적으로도 지역 간 분열 양상은 정신적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는 현실이다.
내년 2010년이면 우리로서는 부끄러운 한일합방 100년을 맞게 된다. 또 금년은 나라의 國母가 왜인의 칼날에 시해 된 것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여 “내 나라 國母를 살해 한 죄 값이다”라고 하면서 그나마 국권에 대해 자존심을 지켰던 안중근 의사 의거 100년이 되는 해이다. 바른 역사에 대한 고찰은 바른 정체성을 세우는 일이다. 원한에 사무친 지난 역사를 들추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겠으나 원수를 갚기 위한 역사의식이 아니라 힘없이 국권을 빼앗겨야 했던 근본 원인을 성찰하는 역사의식은 반드시 필요하다. 정체성이 빠진 모방은 결국 주체성을 가지고 있는 자의 하수인이 될 수밖에 없다.
역사가 문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지만 그 문화는 역사를 화려하게도 초라하게도 만드는 옷과 같은 것이다.
독도의 역사는 필사의 기록을 할 수 있었던 신라 때로부터 근 현대사까지 여러 가지 역사적 근거들을 가지고 있지만 물리적 힘에 의한 이 나라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현재까지 일제의 잔재로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이 어떤 이유로 또 무엇을 가지고 독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100년을 한결 같이 애정을 쏟는 것일까? 이유는 일반적으로 잘 아는 군사적, 경제적 가치 때문이라고 한다. 남의 땅을 빼앗으려면 명분 있는 타당성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명분화 한 계기를 찾아본다면 대중 매체를 활용 할 수 있는 인쇄술을 이용한 메이지 유신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물론 그전에도 조선 침략이 잦았지만) 당시 일본은 조선 식민지화를 꾀하면서 자국민의 정서를 이용, 일본 국민의 힘을 하나로 모으는데 많은 노력을 한다.
조선 식민지화를 위한 일차적인 작업으로 저급한 조선 시찰 사진과 엽서를 만들어 보급한다. 조선은 일본의 보살핌을 받아야 되는 나라로 미화하고 자국민의 공감을 끌어 낸 후 막대한 전쟁 자금을 국민 성금으로 모으고 이를 명분 있는 전쟁을 위한 발판으로 삼게 된다.
이는 보편적인 정서와 백성의 힘이 총칼보다 무섭게 큰 힘을 발휘하게 된다는 것을 확실하게 이용한 결과이다. 일본은 현재까지 그 보편적 정서를 전 세계를 상대로 사용하고 있다.
가장 많이 쓰는 방법이 한반도와 일본사이의 바다 명칭을 일본해로 표기하여 홍보하고 있다. 우리의 옛말에 ‘낙숫물에 바위 뚫린다.’는 말이 있는데 이에 해당이 될 것 같다.
국토로서 주권적인 조건은
1.사람이 거주하는가
2.마실 물이 나는가
3.나무가 있는가를 본다.
또 ‘영토적 주장’과 ‘역사적 주장’을 들 수 있는데 우리는 독도에 대해 이미 조건을 모두 충족하고 있다. 독도 현대사부터 보더라도 1965년부터 사람이 들어가 살기 시작하여 1981년에 행정적으로 주민등록까지 갖추고 산 어부 최종덕씨 일가족이 있는데 그는 제주 출신 해녀들을 독도로 이주 시켜 작은 마을을 구성, 어업에 종사했다. 당시 함께 생활 했던 어부와 해녀 들 중 독도에 가장 오랫동안 16년을 살았던 제주 출신 고순자 할머니(74세 제주시 거주)는 당시 생활상을 생생하게 들려 준다. 그녀의 나이 40세가 되던 해 1973년 독도에 가서 물질을 하면 제주도 보다 많은 수입을 얻을 수 있다는 말에 최종덕 어부를 따라나서 몇 명의 울릉도 어부들과 해녀들이 한 식구가 되어 살았다. 막내 아들이 5살이었는데 뽀빠이 라면땅 과자 이십원 하던 그 시절 아들에게 그마저 마음껏 못 사준 것이 늘 마음에 걸렸는데 물질을 하면서 소라 하나 해삼 하나 잡을 때마다 보고 싶은 아들을 위해 그 과자 값을 계산하고 뭍에 올라오면 수경 속에는 바닷물이 아닌 눈물이 가득히 고여 있었다고 지금도 당시를 회상하면서 눈물을 보인다. 최종덕 어부의 약속대로 이듬해 당시로서는 큰돈인 150만원을 모아 집에 보냈고 그렇게 해서 병약한 남편 병원비, 5남매 교육비를 집에 보냈고 귤 농장도 사고 하여 형편이 나아질 즈음 1987년 최종덕 어부가 급서한다. 그리고  3년 후 고순자 해녀도 독도를 떠났다고 한다. 이분들은 독도 현대사의 기틀을 놓은 산 증인들이다.
 
후일 1991년에는 독도가 출생지인 ‘조한별’ (여: 1991년생 대학1학년)이 태어나는데 현재까지 한.일 양국 간 유일한 존재 '독도 1호'이다.
가진 자는 넉넉하고 여유로운 법이다. 그러므로 많은 독도 단체들이 목청 높여 부르짖는 것보다 어떻게 관리하고 보존 할 것인가에 대한 미래 지향적 사고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출발은 내 나라 땅 독도에서 어려운 환경을 개척하고 생활인으로 살았던 분들의 건강상의 후유증을 돌아 보는 것 등은 가장 현실적이고 독도 지킴이다운 명철한 행동이 될 것이다. 더 이상 피해 의식에 사로잡힌 우리의 감정 분출은 우리를 더욱 초라하게 할 뿐이다. 국토로서의 실재 점유권의 본질을 확고히 하는 것이 중요 할 것이다.
다행히 세계를 상대로 독도 홍보에 다양한 컨텐츠를 개발하고 보급하는 운동도 자리를 잡아 가고 있다.
내년이면 한일 합방 100년이 되는데 계속적인 원한에 사무친 역사의식만을 강조 하는 지나친 과거 지향은 오히려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다. 우리의 정체와 주체를 확고히 하면서 시대적 안목을 길러 떼어 낼 수 없는 이웃은 보듬고 가는 것이 후손을 위해 바람직한 선택이 될 것이다.
국내적으로 볼 때에도 독도 이름의 유래에서 알 수 있듯이 고종왕 당시 이규원<울릉도검찰일기:1882년>에 의하면 울릉도 주민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전체 140여명 인구 중 전라도 출신이 82%를 차지하였다고 한다. 자연히 울릉도 대부분의 지명이 당시 전라도 사람들에 의해 이름 붙여졌고 독도는 돌이 많아 ‘石島’라고도 했는데 전라도 방언으로 ‘독섬’으로 부르고 의역하여 ‘石島’, 음역하여 독도(獨島)라고 쓴 것인데 그 이름이 현재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로 비추어 볼 때 필경 골 깊은 영.호남의 분열 된 지역감정을 화해를 위한 근간으로 삼고자 했던 선견적 행동으로 보여진다. 그러므로 영.호남 화합의 힘은 대한민국 힘이고 그것은 온전한 남북통일을 이루는 초석이 될 줄 생각한다.
분열의 상징이 된 독도는 털고 일어나 가진 자답게 화해의 중추적 역할을 해야 한다. 이제 독도는 각계 각층을 통하여 각 시.도 간 활발한 교류와 연합을 도모하고 아름다운 독도 가꾸기에 애정을 들여 작은 마을을 만들고 이를 위해 주민이 거주 할 수 있는 조건을 개발 해 나가는데 필요한 독도 개척의 삶10~20년의 실재 주인공들에게 많은 조언을 듣는 것도 바람직한 판단이 되리라 생각한다.
또한 해외에서도 독도를 주제로 다양한 홍보 자료 보급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인데 독도에 대한 바른 역사적 토대 위에서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일을 하는 것이 중요 할 것이다. 
매년 10월 25일은 ‘독도의 날’이다. 이번 ‘독도의 날’ 행사로서 처음으로 ‘독도 생활(65~90년까지)사진전’이 전국으로 가장 많은 인파의 유동이 있는 서울역에서 열린다. 독도의 흔한 풍경 사진전이 아닌 독도를 하나의 작은 마을로 가꾸어 나가는 과정과 그곳에서의 생활 상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독도에 대한 국민적 열망에 부응하기 위한 행사로서 당시의 사진들은 우리에게 독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데 기여를 할 것으로 본다. 이와 같은 일들은 활발한 독도의 힘찬 고동소리가 되어 독도의 미래를 열어가는 에너지가 될 것을 기대한다..
 
 
당시 최종덕 어부와 함께 생활 했던 어부와 해녀 들 중 독도에 가장 오랫동안 16년을 살았던
제주 출신 고순자 할머니(74세 제주시 거주)는 당시 생활상을 생생하게 들려 준다.
그녀의 나이 40세가 되던 해 1973년 독도에 가서 물질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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